요한복음 네 번째 시간

성전 정화사건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2장 12절 - 3장 36절

 

 

목표:

성전 정화사건이 주는 의미와 요한복음에만 기술되어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를 통해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살펴봄.


 

안내:

오늘 공부할 내용은 성전 정화사건이라는 표징과 그 표징에 대한 해설이라고 볼 수 있는 니고데모와의 대화입니다.  지난 시간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해 이세상의 모든 종교가 고갈된 상태에 있고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새롭게 채우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에 덧붙여 그 당시까지 하느님에 대한 예배가 이루어졌던 성전이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성전 정화사건에는 어떠한 기적 현상도 나타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이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하고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이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참된 성전이 되리라는 사실을 가리키므로 우리는 하나의 표징으로 간주합니다.  요한복음의 처음부분에 나타나는 성전성화사건은 공관복음에는 마지막 부분인 수난기에 나타납니다.  이런 연대기적 차이 때문에 많은 성서학자들은 연구를 거듭했는데 어떤 이들은 성전 정화 사건이 한 번이 아닌 두 번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을 나중에 편집한 제자들이 여러 두루마기로 되어 있던 문서들을 땅에 떨어뜨려 원래의 순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건들에 대한 연대기적인 기록들이 공관복음보다 더 정확성한 것을 볼 때 성전 정화 사건을 앞부분에 배열한 것은 실수가 아닌 저자의 의도에 의한 것이라는 해설이 가장 신빙성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공관복음서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연대기적 순서로 기술을 하였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요한은 예배 장소가 예루살렘 성전에 국한되지 않은, 더 이상 대사제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성막 안이 아닌, 장소에 구애를 받지 않는 예수님의 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앞부분에 배열했다고 봅니다. 


성서에 나오는 예루살렘의 성전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유대인들에게는 세개의 성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솔로몬 성전: 유배 이전의 성전으로 제1성전이었습니다. 솔로몬 왕은 기원전 972-933년까지 40년간 이스라엘을 다스렸는데, 기원전 968-961년에 이 성전을 건립하였고 (1열왕 6-8장; 2역대 3-5장) 기원전 587년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킬 때 파괴되었습니다.  이 성전을 위해 과도한 세금을 거두어들였기 때문에 남북으로 분리되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2. 즈루바벨 성전: 유배 이후의 성전으로 제2성전이라고 합니다. 바빌론 유배기간(BC. 587-538년)이 끝나고 538년 바빌론에서 유대 땅으로 귀환한 후 예언자 하깨와 즈가리아의 독촉을 받고 지도자 즈루바벨이 기원전 520-516년 사이에 세운 것입니다(에즈 1,3-6). 물론 이것은 솔로몬 성전보다 많이 검소하게 지어진 성전이었지만 민족 부흥의 표지로서, 또 이교도에 대한 저항의 중심지로 유대인들이 아꼈던 성전이었습니다. 한때,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해서 기원전 165년에 손상을 입었다가 유다 마카베오에 의해서 수리되었습니다(기원전 164년).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침공할 때 이 성전은 손상되지 않았습니다. 

3. 헤로데 성전: 예수께서 정화를 시도하신 성전은 세 번째 성전인 이 헤로데 성전을 지칭합니다. 유다인들에 의해 뽑힌 것이 아니라 로마인들의 비호로 권력을 잡은 헤로데 대왕(기원전 37-4년까지 재위)은 유대인들의 호감을 사기 위하여 기원전 20-19년에 성전을 다시 세우기 시작했고 솔로몬 성전을 능가할 계획으로 신축을 하였습니다. 이 성전이 완공된 때는 서기 64년, 그러니까 예수 당대에는 아직 건축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헤로데 성전은 서기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로마군인들에 의해서 불태워졌으므로 완공된 후 겨우 6년 동안 사용되다 파괴되어 버립니다. 본문에 보면 (2,20) 그 당시까지 성전을 짓는데 46년이 걸린 것을 알 수 있는데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A.D. 1년이 아닌 B.C. 6년으로 보는 것도 이 구절에 근거한 것으로 보입니다.


환전상들의 필요성

성전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전제를 내야 했는데 정결법 상의 문제로 일반 화폐가 아닌 세겔이라는 특별한 고대 히브리 화폐를 요구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통용되던 화폐를 성전에서 환전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환전을 할 때 2.1%내지 4.2%의 프리미엄이 붙었다고 하는데, 이 프리미엄은 환전상들과 성전 사제들 사이에 배분되어 그 일부는 성전에 축적되었다고 합니다.  환전을 꼭 성전 안에서만 해야 한다는 법규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전 안에 들어올 때까지 미쳐 환전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나 제물을 준비해오지 못한 사람들은 성전 안에서 더 비싸게 파는 제물과 더 비싼 프리미엄을 물며 환전을 해야만 했습니다.


 

구문해설


2,17: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시킬 권한이 있음을 나타내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즉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집을 정화시키고자 함을 드러냅니다.

2,18: 그때에 유다인들이 나서서 - 요한복음에서는 “유다인들”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만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복음이 바로 요한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실제로 요한 복음이 유다인을 비난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되었던 적이 있다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다인이 긍정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는 하느님의 계시의 수용자인 유다 민족을 지칭할 때이며 (구원은 유다인으로부터 온다. 4,22) 대개의 경우 거짓된 제자들이나 예수님을 제거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권력자, 사제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됩니다. 

2,23b: 많은 사람들이 그것(기적)을 보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 이 구절에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의 근거와 그 상태가 시사됩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접한 이들을 세 부류로 구분을 할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류는 이들은 표징을 보고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는 기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기적의 수행자, 예언자, 하느님이 보낸 사람 등으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기적이 가져다주는 완전한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믿음에 도달할 수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부류는 기적의 참 의미를 받아들여 참된 신앙 즉 예수를 참 사람이자 참 하느님으로 받아들이는 부류입니다.  기적의 외적 현상에만 의존한 믿음은 완전하지 못한 믿음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2,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 - 이는 기적 현상에만 혹하여 몰려들 뿐 그 기적이 나타내는 바를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3장 니고데모와의 대화

 

예수님의 기적을 목격한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대화를 하는데 예수님은 그의 믿음의 상태가 두 번째 부류인 것을 알아차리시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3,2: 어느 날 밤에 예수를 찾아와서 - 이 구절은 세 가지로 달리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 니고데모가 남의 이목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을 시사할 수도 있고, 두 번째는 니고데모가 어둠의 세력에서 빛이신 예수께로 왔다는 사실을 상징할 수도 있으며, 세 번째는 율법 공부가 주로 밤에 행해지던 당시 관례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3,3: 누구든지 새로 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 새로 난다는 말의 의미는 하느님에 영에 의해 새롭게 되는 사실을 말하며 따라서 오직 하느님에 의해서만 하느님과 새로운 관계를 갖게 됨을 나타내줍니다.  니고데모는 새로 난다는 것을 육체적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3,6: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종족 안에서 태어나는 것은 하느님 나라를 보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태어남은 하느님의 성령으로부터 태어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내줍니다.

3,8: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나 이와 마찬가지다. - 갑자기 예수님께서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듣기 힘이 듭니다. 여정에서는 ‘영에 의해 다시 태어남은 부는 바람의 움직임과 같이 현실적이기도 하고 신비스럽다.’고 해석을 합니다. 200주년 주석 성서에서는 이렇게 설명되어있습니다.

자연 현상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없었던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바람”을 오묘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신비로운 성격과 하느님 행동의 심오한 성격을 비교하곤 하였다. (잠언 30,4; 집회 16,21).  

즉 성령에 의해 다시 난 사람들은 바람과 같은 신비스러움을 갖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3,11: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고, 우리의 눈으로 본 것을 증언하는 것이다. -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복음사가와 그의 공동체를 지칭한다고 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나”를 사용합니다.  실제로 11절의 말씀은 제자들이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 후 주님을 증거할 때의 상황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3,12: 너희는 내가 이 세상일을 말하는데도 믿지 않으면서 어떻게 하늘의 일을 두고 하는 말을 믿겠느냐? - 역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200주년 성서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세상일”은 사람들이 성령에 따라 새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현세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리킨다.  그리고 “하늘의 일”이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십자가 위에서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신비를 가리킨다.  따라서 니고데모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도 믿지 못하는데 어떻게 십자가의 신비를 믿을 수 있겠느냐고 하시는 말씀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세상일”이란 또는 제자들의 증언을 뜻하고 “하늘의 일”이란 영광 속에 들어 높여지신 예수님과 성령의 증언을 가리킨다. 


3,13: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의 아들 - 예수님께서 자신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신 사람의 아들이 뜻하는 여러 가지 중의 하나는 우리가 새로 태어남이 예수님의 신성으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닌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우리의 구원이 완전한 인간으로서 죽음에 이르는 수난을 받으신 예수님의 공로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고 봅니다.    

3,14: 구리 뱀이 광야에서 모세의 손에 높이 들렸던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 저자는 죽음을 맞는 예수의 몸이 위로 들어올려지는 것을 아버지께로 되돌아가시는 승천의 시작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높이 들린다”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모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자가 민수기(21,4-9)에 나오는 구리 뱀을 예로 든 것은 니고데모가 구약에 잘 알고 있음에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즉 모세가 높이 들어 올린 뱀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이들은 하느님에 의해 치유를 받았듯이 예수의 높이 들림(죽음과 부활)을 믿는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3,29: 신부를 맞을 사람은 신랑이다. - 우선 세례자 요한은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유다 관습에 따르면 신랑의 들러리(친구)는 신부의 준비가 다 되었나 확인하여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성서에서 혼인은 자주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간의 계약에 비유되었는데 여기서 세례자 요한의 말은 하느님 백성들을 새로운 계약으로 이끄실 분은 바로 예수님이시고 자기는 백성을 예수님께 인도하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밝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 공생활의 시작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례를 베푸신 시기를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힌 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 4,8; 마르 1,16; 루가 5,11).  그러나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동시에 세례를 베풀고 계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나타내보이고 있습니다.  공관복음의 저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하신 정확한 시기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단지 예수님의 활동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 갇히게 됨을 길잡이로서의 그의 역할이 끝났다고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의 갈등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습니다.  여정에서는 이러한 갈등을 밝힌 저자의 의도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스승의 역할이 무엇이며 누가 진정한 메시아임을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밝히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가 바로 성전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또한 하느님이 지상에 머무르는 장소를 오직 성전의 중심부에 있는 성막 안이라고 정해놓고 오직 대사제 한사람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게 해놓았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그 성전을 허물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으로 바꾸어주시지 않으셨다면 지금 우리는 어찌 되었을까 상상해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바리사이파로서 유다인의 지도자인 니고데모(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권력층을 구성하고 있지 않음을 볼 때 니고데모라는 인물은 율법에 박식한 지식인들과 권력자들을 대변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남은 자신이 가진 지식이 하느님의 지혜에 비해 얼마나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임을 깨닫지 않는 한, 자기가 가진 현세에서의 권위가 하느님의 영원하신 권세에 비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을 깨닫지 않는 한 불가능에 가까운 일임을 오늘 복음에서는 말해주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바로 자신이 기다리는 메시아이심을 알고 있던 세례자 요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하고 있던 일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던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어야 하지만 그는 이미 많은 제자들을 거느린 영향력 있는 자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는 비록 내가 주님을 알고 성령을 체험하고 난 후에도 여전히 세속이 주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진정한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기적과 같은 일이지만 그분의 권세 앞에서 완전히 무릎 꿇어 그분과 동참하는 일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것임을 깨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