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아홉 번째 시간

빛의 심판

9장 1절 - 10장 39절

 

 

목표: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지에 대해 알아봅니다.

안내:

이번 시간에는 다시 안식일에 소경을 고치신 이야기를 통해 앞을 보지 못했던 소경이 예수님께 대한 완전한 신앙을 갖게 되는 경위와, 예수님께서 자신을 착한 목자에 비유하신 그 배경에 대해 공부합니다.  지난 시간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신 예수님께선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소경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소경이 앞을 보게 해주신 것만이 아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게 되는 영적인 눈을 뜨게 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 앞서 왔던 사람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신뢰하고 있던 예언자들이나 교회 지도자들)은 사물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경에게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고, 오히려 시력을 찾은 그를 울타리 밖으로 쫓아내는 그러한 거짓 목자임을 밝히십니다.  10장에서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참된 목자의 본질이 무엇임을 알려주시며 예수 자신이 바로 참된 목자이심을 밝히십니다.  이로 인해 모든 목자들은 빛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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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헌절: 유다 마카베오가 시리아의 안티쿠스 4세를 물리친 다음에 성전을 복구하고 새로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 12월 말경에 벌어졌습니다.  

실로암 연못: 지도1.jpg

에제키아 지하수도 끝, 티로페온의 계곡에 있는 이 연못의 수조는 기혼 샘에서 솟은 물을 받아 형성된  저수지로서 현재에도 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오른쪽 사진 참조). 장님의 눈을 뜨게 한 예수의 기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이 연못은  '파견된 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이 연못의 물이 시력을 되찾게 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메시아로 ‘파견된 분’께서 이 세상에 하느님 계시의 빛을 가져다 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초기 공동체 신자들에게는 이 연못에 가서 눈을 씻는 행위는 세례 의식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고 합니다.  

유다인의 회당에서 추방되는 것의 의미: 대수로운 일이 아닌 것 같이 보이나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에게는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는 커다란 재난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다인들은 상당한 특전을 부여받고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의식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종교의식에는 우상숭배의식이 들어있기 때문에 공동체에서 추방된 유다인들은 이 종교의식에 참여해야만 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눈을 뜬 소경이 유다인의 회당에서 추방당하면서까지 유다인들 앞에서 예수님을 인정한 것은 목숨을 건 신앙 행위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소경이 예수님께 대한 완전한 신앙에 도달하는 과정:  9장을 보면 치유를 받은 사람이 처음부터 완전한 신앙(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도달한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점차 나아갔고 완전한 신앙에 이르기까지는 주변의 박해를 극복했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 그는 "예수라는 분"(9,11)으로 묘사를 하고, 나중에는 "예언자"(9,17)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의로우신 분', '하느님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고백하였고(9,33), 마침내 예수님과 대면했을 때 그분 앞에 꿇어 엎드려 경배하면서 "주님, 믿습니다" 하고 고백합니다. (9,38)  

구문 해설

9,3: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 예수님 시대의 사람들은 병이 든  까닭을 본인이나 조상이 잘못을 해서 하느님이 내리는 재앙으로 해석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소경은 태어날 때부터 소경이었으므로 본인이 죄를 지을 수가 없었으므로 조상의 죄 때문에 소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제자들은 생각했고 실제로 유다인들은 치유를 받은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쓰고 태어났다."고(9,34) 그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이유를 설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소경이 된 이유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실제로 많은 경우 치유를 받음으로써 자신뿐만이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까지 하느님을 믿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치유의 기적 행위가 안식일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부정하려고 했고, 소경의 부모조차 신변의 위협 때문에 그들의 자식이 치유를 받은 경위를 증거 하려고 조차하지 않았습니다.  

10,7: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 목자가 자기 양떼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아주 정상적이 방법인 문을 통해서이며 통상 양들의 우리에 문이 하나이듯, 그분이 양떼들에게 접근하시고 돌보시는 방법 또한 지극히 정상적이고 단 하나의 참된 방법임을 밝히는 구절입니다.  

10,8: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모두 다 도둑이며 강도이다. -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당신 이전에 왔던 모든 지도자들을 예외 없이 단죄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절은 고대 필사본들 안에 제대로 보존되지 못했고 따라서 우리는 이 대목을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하는지 확실하게 모르므로 이 구절을 너무 중시 여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여정에서는 풀이하고 있습니다.  200주년 성서에서는 '예수님보다 먼저 온 자들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유다의 세계에서든 다른 민족들의 세계에서든, 자기들의 수단과 방법만으로도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과 구원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내세우는 자들을 말한다'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10,11: 나는 착한 목자이다. - (I am the good shepherd.) 여기서의 '착한'의 원 뜻은 '아름다운'을 뜻하지만 그 의미는 '완전한', '이상적인', 또는 '모범적인'이라고 합니다.  모범적인 목자는 자기 목숨을 바쳐서까지 양들의 생명을 지키는 목자이며 삯꾼들은 자기가 살기 위해 양들을 버려 두고 도망쳐버린다고 가르치십니다.  개신교 성경에는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10,14: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 - 구약의 전통에서는 '서로 안다' 는 표현이 단지 아는 것만이 아닌 상호간의 사랑도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보다 제자들에게 더 가까울 수 없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이 친밀한 관계를 상호 내재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예수님은 제자들(양들) 안에 사시고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정)

10,16: 나에게는 ......다른 양들도 있다. - 예수께서는 모든 민족들의 목자이시므로 그분의 양떼 속에는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10,18: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버지에게서 내가 받은 명령이다. - 해석하기 힘든 구절입니다.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성부의 행위로 적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의 권능을 모두 지니고 계시므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스스로 다시 살아나실 수가 있기 때문에 그분의 부활을 자신의 행위로 말하는 것은 아주 합당한 일이라고 합니다. (여정).  이 구절은 다음에 오는 구절을 참조해야만 올바른 해석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죽으심에 있어서나 부활하심에 있어서나 아버지인 성부의 뜻에 순종하신다는 사실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10,3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 유다인들은 사람인 예수님이 하느님과 동일하다고 하신 말씀을 신성모독으로 여기었기에 돌을 집어듭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판관들을 신이라고 지칭하신 것을 지적하시며 (시편 82장 6절) 하느님의 말씀 자체이신 분으로 하느님의 파견을 받아 세상에 오신 본인을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함을 주장하시고있다고 합니다. (여정) 그러나 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 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바로 하느님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모든 권한을 가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물을 비추는 '빛'과 그 빛을 인식할 수 있는 '시력'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한다는 것,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일반적인 시력으로 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당시 유다인은 율법(안식일에 일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모세의 제자라는 사실 때문에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그것들 때문에 그들이 눈멀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시력을 갖는다는 것은 그분을 완전한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신앙 행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시력은 처음부터 뚜렷하고 완전한 것이 아닌, 처음에는 미약하지만 점차 성장해나가는 그런 것임을 이번 성경구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게되는 고통과 박해는 예수님을 뚜렷하게 볼 수 있게 만드는 도구와도 같은 것이지 않을까요. 오늘 이야기에 나오는 소경은 눈이 멀지 않았더라면 결코 예수님께 치유를 받지 못했으며 유다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았다면 결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인정하는 소경 같은 상태의 겸손함이 어쩌면 주님을 바라 볼 수 있게 만드는 길일지도 모릅니다. 여러 가지 이유나 아니면 아무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은 때론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고통을 승화시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꿀 수 있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