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여섯 번째 시간

영원한 생명

4장 46절 - 5장 47절

 

 

목표:

아버지로부터 예수님께 부여된 권능, 즉 생명을 주고 심판하는 권능을 살펴봄.

안내:

이번 시간에 공부할 내용에는 두 개의 표징과 하나의 해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표징은 죽을 병이 든 소년의 치유입니다.  가파르나움에 사는 고관은 예수님을 찾아와 죽어 가는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합니다.  그 고관은 예수님께 치유를 청할 만큼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30마일이나 떨어진 거리에서 그런 기적을 행하실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가파르나움으로 갈 것을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기를 주저하시지만 믿음을 주시기 위해 기적을 베푸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고관의 태도와 마태복음 8장 5절에 나오는 백부장의 태도에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이 거리에 제한을 받지 않음을 아는 백부장의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크게 칭찬하십니다.  두 번째 표징은 안식일에 이루어진 병자의 치유입니다.  다른 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박해를 받기 시작한 것이 바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모세가 율법으로 정해놓은 안식일을 예수님께서 지키지 않는 것이 유다인들에겐 가장 좋은 박해의 구실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해설부분은 이 두 가지 표징으로 드러난 예수의 신적 권능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표징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목숨을 되살리는 능력을 지녔다는 사실과 당신의 말씀을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에로 부활시키는 권능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 가파르나움

신약성서 전반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가파르나움이라는 도시는 위로의 마을이라는 뜻으로 갈릴리에서 서북쪽으로 위치한 갈릴래아 호수가에 있는 성읍이며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제 2의 고향입니다. (마태 4,13).  다마스커스에서 지중해 방면으로 왕래하는 통로인 관계로 상업이 번창하여 예수님 당시에 가장 번화한 도시였으며 이 곳에서 예수님은 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마태오 등의 다섯 제자를 부르셨습니다. (마태4,13.18-22; 9,9).  하지만 지금의 가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하신 저주의 말씀 때문에 호숫가 종려나무들 속에 폐허 더미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마태 11,23).  가나는 가파르나움에서 서남쪽으로 30마일 떨어진 산골에 있습니다.

베짜타 연못:  은혜 혹은 친절의 집이라는 뜻으로 개신교에서는 베데스다 못이라고 부름.  1888년에 이 연못이 발견되기 전 까지는 베짜타의 다섯 행각을 모세 오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이 연못은 본래 기원전 2세기 시몬이 대제사장으로 있던 때에 세워진 길이 100-110m, 너비 62- 80m, 그리고 깊이 7-8m의 두 개의 쌍둥이 연못으로서, 성전에 물을 공급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종교적, 의학적 치료를 목적으로 건설되었습니다 . 이곳은 치료의 효과가 있다고 해서 환자들이 늘 집합되는 장소였습니다.  4세기 무렵 이 연못가에 지어졌던 성 마리아 프로바디카회당 폐허에는 예수께서 이 기적을 행하신 것을 묘사한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안식일: "안식일(Sabbath)"이라는 말은 "중단하다" 혹은 "그만두다"는 뜻의 히브리어에서 나온 것으로 한 주에 하루는 일을 그만두고, 쉬는 것을 말합니다.  이 안식일에 대한 규정은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십계명에 들어있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많은 수의 제한들이 안식일을 둘러싸게 되었고, 어느 때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정통 유다인을 그리스화 된 사람들과 구분하는 척도 자체가 되기까지 했습니다.  극도로 율법을 지키려는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도 안식일을 깨지 않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곡식 이삭을 뜯어서, 외피를 벗기고, 낟알을 먹음으로써, 일종의 추수를 한 것이고, 그것은 모세오경에 언급되어 있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안식일에 얽힌 모든 형식에 구애되는 것들을 타파하십니다.  마르코 2:27.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즉 안식일 제정에 대한 목적은 사람들이 일년 12달 노동으로 착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과 세속적인 일을 벗어나 주님을 경배하기 위한 시간을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원래 안식일은 토요일이었으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주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에 쉬고 있습니다.  성경에 쓰여진 대로 해야만 한다는 일부 개신교인들은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에 쉬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구문 해설

4,46-54: 고관 아들의 치유 - 이 기적은 하나의 표징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서 사람의 목숨을 되살리는 능력을 지녔다는 것은 물론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 즉 예수께서 당신의 말씀을 믿는 이들에게 지금 이 세상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실 권능과 착하게 살았던 모든 사람들을 마지막 날에 영원한 생명에로 부활시키는 권능을 지니고 계시다는 사실을 지적해 줍니다.  

5,1-15: 안식일에 일하심 - 여정에는 베짜다 연못의 다섯 행각이 모세 오경을 상징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연못이 발견되기 이전에 쓰여진 주해서를 참조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 당시 라삐들은 하느님께서 어떤 식으로 매주 안식일을 지키셨는지에 대해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안식일에도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으로 보아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일, 즉 생명을 주고, 심판을 내리는 일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에서 일손을 놓고 쉬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시는 것을 보고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하는데 (5,16)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도 안식일에 일하시는 것처럼 자신도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자신을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 놓는 일이므로 이 때부터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죽일 마음을 굳힙니다.  

5,16-30: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 이 부분에서는 앞서 행하신 표징들에 대한 해설이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과 하느님의 동등성을 노골적으로 단언하지는 않으시지만, 죽은 사람을 영원한 생명에로 부활시키거나 죽은 사람에게 영원한 벌을 내릴 수 있는 아버지의 권능을 당신이 갖고 계심을 선포하십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신적인 권능은 최후의 심판이 있기 훨씬 전인 지금도 발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를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다(5,24)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그분 안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마지막 날에 단죄 받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5,27: 아버지께서는 또한 아들에게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다.  그는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 여정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더 부드럽고 자비로운 심판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인류를 심판하실 분은 사람인 것이다.'라고 해설되어있습니다.  하지만 200주년 주해성서에는 여기서의 '사람의 아들'이 다니엘서나 에녹서 등에 나오는 종말의 심판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5,31-47: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증언 - 당시 어떤 일의 진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둘 이상의 증언이 필요했는데 예수께서는 사람의 증언이 소용없으나 다만 유다인들의 구원을 위해, 즉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 증언을 나열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루고자 하는 것이 그분의 뜻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그분의 심판은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하시기 위해 첫째로 세례자 요한의 증언(1,19-27)을 내세우시고, 둘째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그 증거로 삼으십니다.  

5,45: 너희를 고발할 사람은 오히려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 - 유다인들은 "생명의 율법"을 준 모세에게 희망을 걸어 온 것은 모세가 구원의 보증인이요 하느님 앞에서 자기의 "대변자"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세가 유다인들을 고발하게 된다 함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자(그리스도)에 관한 모세의 증언(신명 18,15-19)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 모세오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던 베짜타 연못의 다섯 행각은 고고학자들의 발견으로 이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고찰이 입증됨으로써 실제 있었던 사실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이렇듯 성서의 해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완전함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베짜타 연못가의 환자는 여러 면에서 죄 많은 우리 자신을 연상케 해줍니다.  병석에 38년이나 누워만 있으면서도 자신을 움직여 줄 사람이 없음을 한탄하는,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예수님을 믿기는커녕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러한 절망의 상태에 있는 그는 일상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무기력한 저희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의 가련함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를 치유해주고자 하십니다.  병자에게 우스운 질문으로 들리겠지만 예수님께서는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은 이렇듯 강요함이 아닌 우리의 의중을 더욱 소중히 여기시는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렇듯 단지 "예"하고 대답하기만 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 다음의 이야기에서는 더욱 중요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베푸시는 죄사함의 은총으로 육체적인 질병은 치유가 되었지만 그 후에 저지르는 잘못은 더 흉한 일을 가져오게 됨을 알게 됩니다.  베짜타 연못가의 병자는 예수님께서 이러한 경고를 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다인에게 가서 예수님을 밀고합니다.  유다인들이 그를 치유시킨 자를 찾는 목적이 안식일에 요를 들고 가게 시킨 범법자를 색출하기 위함을 그 병자가 모르는 것이 아닐 진데도 그는 유다인을 찾아가서 그의 병을 고쳐준 분이 예수라고 말합니다.  어쩌면 그는 유다인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현재 주님을 믿고 따르는데 있어서 외부로부터 생명에 대한 위협이나  어떠한 제약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르는데 있어서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바로 자신이 아닐까요.  세속적으로 어떠한 피해도 보고 싶지 않아서, 세상 부귀와 명예가 주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못해서 우리는 "예" 하기만 하면 받을 구원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보내신 분을 믿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