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여덟 번째 시간

나는 나다

7장 1절 - 8장 59절

 

 

목표:

예수께서 자신을 "샘솟는 물의 원천"이요 "세상의 빛"이시며, "나는 ......이다"라는 하느님의 이름을 가진 분으로 밝히시는 성서본문의 배경과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안내:

오늘 공부할 내용인 7장과 8장은 요한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긴장감이 도는 대목입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이후로 유다인(바리사이파인)들로부터 위협을 느끼신 예수님은 유다지역을 피해 갈릴래아 지역에서만 활동을 하십니다.  초막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에 가신 예수님은 자신을 샘솟는 물의 원천이고, 세상의 빛이시며, 하느님의 이름을 가지신 분,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계신 분 등으로 자신의 신성을 밝히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으나 유다인 지도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이 말씀을 신성모독이라 여겨 예수님을 죽일 결심을 굳히게 됩니다.

8장 1절에서 11절의 내용은 많은 복사본에서 이 내용이 누락되어있기 때문에 후세의 사람들이 첨가했다고 여겨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에피소드이기도 한데 여정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을 부록으로 따로 마련해둡니다.  이 에피소드에서 우리는 구약성서에서 '지혜'로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8장 12절부터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성을 본격적으로 밝히시며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다인들에게 그를 믿지 않는 것은 그들이 "악마의 자식"이기 때문이라며 그들을 비난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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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막절: 초막절은 유다의 달력에서 과월절, 오순절 다음에 오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순례 축제로 원래는 추수를 경축하는 축제였습니다.  이 축제는 7일 간(8일간: 200주년 성서)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동안 물의 예식과 비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축제가 '초막절(장막절)'로 불리게 된 까닭은 사람들이 이 축제 기간 동안 나뭇가지와 그 잎으로 움막을 짓고 그 속에서 지내며 그들의 선조들이 광야에서 떠돌던 시절을 되새겼기 때문입니다.  이 기간동안 지중해 주변 전역에서 유다인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성경에서 예언된 대로 구세주가 초막절 기간 중에 자신을 드러내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축제 동안에는 예루살렘 도성의 아래에 있는 샘에서 물을 길어 성전의 바닥에 쏟는 의식을 행했는데 이는 다음 해에 풍성한 수확을 비는 청원 외에 구세주에 대한 그들의 목마름을 표현하는 행위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샘솟는 물"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 초막절이라는 축제를 염두에 둘 때 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구문 해설

 7,3: 예수의 형제들이 - 성서에서 “형제”는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동기도 가리키고 가까운 친족도 가리킨다 (창세 13,8; 14,16; 29,15; 레위 10,4; 1역대 23,22).  마태복음 12장 46절에도 예수님의 형제에 대해 나오는데 개신교에서는 여기서의 형제들을 친형제로 해석, 성모님의 평생 동정성을 부인하는데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7,10: 형제들이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께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올라 가셨다. - 예수님께서 형제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혼자 몰래 예루살렘 성전으로 행하신 것은 가까운 형제들조차 예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신 그 의도를 모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기적의 행위들이 단지 유명해지기 위한 수단으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7,16: 내가 가르치는 것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가르침이다. - 나의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밝히시는 예수님의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겸손함은 이와 같이 자신의 잘난 점이 모두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데 있다 하겠습니다.

7,21: 내가 안식일에 일을 한 가지 했다고 하여 너희는 모두 놀라고 있다. - 다른 성경에는 안식일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문맥상으로 공동번역 역자들이 집어넣은 것 같으며 여기서 말하는 한 가지 일이란 베짜다 연못가의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때부터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적으로 간주합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이 안식일에 할례를 베풀고 있는 사실을 지적하시면서 모세의 율법(할례)을 지키느라 안식일을 지키지 못하면서 하느님의 참 뜻인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안식일에 했다고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는 모순을 깨우쳐주려 하십니다.

7,27: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것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 1세기에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지속된 논쟁이 여기에 반영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분의 출신이 다 알려져 있지만 그분을 보내신 분은 아드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Q:그리스도가 어디서 오시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예언이 어디에 언급되어 있는지? A: 개신교의 한 주석서에는 말라기 3장 1절의 인용이라고 하는데 별로 명확하지 않음)

7,29. 33: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은 나를 보내 주셨다........내가 아직 얼마 동안은 너희와 같이 있겠지만 결국 나를 보내신 분에게 돌아가야 한다 - 예수님 스스로 당신이 어디에서 오셨는가와 어디로 가실 것인가를 밝히신 부분입니다.

7,37-38: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서의 말씀대로 그 속에서 샘솟는 물이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 초막절 마지막 날에 거행되는 물의 의식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며 여기서의 성서의 말씀이란 즈가리아서 14장 8절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입니다.  초막절에 행해지던 물의 의식은 다음 해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 물을 기원하는 의식이기도 했지만 그들을 죄에서 구원시켜주는 구세주에 대한 기다림의 목마름을 표현하는 의식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는 구세주이심을 이 구절을 통해 밝히십니다. 복음 본문에서는 샘솟는 물은 바로 세례의 성령이며 이 때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을 보내주시기 전이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다고 되어있습니다.

7,42: 성서에도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이 살던 동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리라고 하지 않았느냐?" - 여기서 언급하는 성서 구절은 미가서 5장 1절을 말합니다.  이러한 구약성서의 예언을 맞추기 위해 역사적으로는 없었던 호구조사를 만들어 나사렛에서 살던 요셉과 마리아를 베들레헴으로 가는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설도 있습니다. (루가 2,1-7)

8.1-11: 간음한 여인 이야기 - 안내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주신 말씀이긴 하지만 원래의 복음들이 씌어진 후에 교회가 삽입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정의(율법)와 사랑(예수님의 가르침)이 도저히 서로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판결을 내리도록 도전 받으실 때 보여주신 그 위대한 지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즉 율법에서 정한대로 돌로 쳐죽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가르침인 자비와 사랑에 거스르게 되는 것이고 또 용서해주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라고 하는 게 되어 어떤 판결을 내리더라도 예수님께 불리한 경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흉계를 꿰뚫어보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는 말씀으로 그들을 물리치십니다.  즉 그들은 여인의 죄를 판결해달라고 요구했다가 자신들에게 떨어지는 판결을 받게된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용서의 판결을 내리셨지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이 이야기는 교회 초기부터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훈으로 이용되어 왔다고 합니다.  주님 앞에 끌려온 여자는 단죄 받을 것 밖에 없는 죄인인 모든 사람과 같지만 이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모든 사람이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만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신 주님은 우리가 앞으로 죄에서 벗어 날 것을 기대하고 계시고 있음을 이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8,12a: 나는 세상의 빛이다.   - 예수님께선 인류 전체를 우리의 목표인 하느님 아버지와의 합일로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의 현존이시기에 구약에서 하느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가리킬 때 사용한 '빛'의 상징을 당신 자신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이 말의 의미를 단지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이신 것이 빛이라든가 당신 백성에게 당신에 대한 가르침이 바로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여정) 예수님의 '빛'은 곧 그분 자신인 것입니다.

8,31: 예수를 믿는 유다인 - 지난 시간에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믿는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음을 배웠습니다.  즉 불완전한 신앙으로 예수님을 믿는 경우와 완전한 신앙으로 예수님을 믿는 경우를 말합니다.  표징이나 기적행위를 통해 예수님께서 위대하신 분이며 하느님께서 그들의 민족만을 위해 보내주시기로 한 예언자나, 메시아임을 믿지만 신성을 가진 분으로는 믿지 못하는 그런 불완전한 믿음과, 예수님을 완전한 하느님의 아들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완전한 믿음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예수를 믿는 유다인은 예수님께 대한 불완전한 믿음을 가진 유다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 하며 예수님을 따라다니지만 실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8,31b-32: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여전히 당신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경우에 참 제자가 될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여기서의 진리란 『사람들에게 충만하고 참된 생명을 가져다 주고 또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을 한데 결합시키는, 하느님의 실상』(200주년 주해성서)을 말합니다.  또한 여기서의 자유란 로마의 지배로부터의 정치적 자유나, 현인이 인간 현실에 대한 숙고의 결과로 도달하게 되는 내적 자립이 아닌 성부 및 성자와 일치를 이루면서(17,3) 충만한 생명을 누리도록 해 주는 능력을 말합니다. (200주년: 어려운 해석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종말론적 자유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수님에게서 받는 진리와 관련된 하느님의 선물을 말합니다.  역시나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지 못하는 유다인들은 자유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께 따지게 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혈통에 속한다는 사실에다 희망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8,40: 그런데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전하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 지금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님은 결국 이들이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게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시고 계십니다.

8,44: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 “악마”는 하느님을 거스르는 존재 그 자체이며 하느님에 대한 이러한 대항은 그분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생명을 파괴해 버리려는 의지로 표현됩니다. 예수님을 죽이려는 의도도 생명을 파괴하려는 그러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기에 예수님을 죽이려는 그들을 악마의 자식이라고 하십니다.

8,56: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은 내 날을 보리라는 희망에 차 있었고 과연 그 날을 보고 기뻐하였다. - 저자는 창세기 17장, 21-22장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이야기를 예수님을 가리키는 표징으로 여겼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아들 이사악을 주신 것을 보고 기뻐한 것을 예수님을 보고 기뻐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8,58: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영원하신 것처럼 영원하신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말씀은 그냥 존재하시는 분으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말씀인 예수께서는 영원한 현재형인 "나다"라는 표현을 쓰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다"라는 표현은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의 이름, "나는 곧 나다"에서 유래합니다. (출애 3,12)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악마의 자식들이요 당신을 믿지 않는 자들이라고 심하게 비난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 바 예수를 안다고, 또는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불완전한 신앙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크게 꾸짖으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상식과 이해가 허용하는 한계까지만 믿고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 전체는 받아들이지 않는 불안전한 신앙의 원인을 예수께서는 그들이 당신 말씀을 받아들일 마음이 없고 새겨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새겨들을 줄 모르고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소위 예수를 믿는다는 유다인들은 논쟁 끝에 그분을 돌로 치려고까지 하고 있습니다.  

마음 편한 대로 적당히, 즉 자기의 이해관계에 맞추어 자기 방식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는 유혹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항상 존재합니다.  그러나 자기 만족에 머무르는 믿음, 어정쩡한 회색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사는 제자만이 참된 제자로서 그분의 진리로 인해 자유로울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살았듯이 우리가 단지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 일주일에 한 번 미사를 빼먹지 않고 본다는 사실만으로 안주해도 되는 것인지. 예수님의 가르침은 2000년 전에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지만 과학 만능주의에 빠져있는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국에 가서는 예수님을 부정하고 예수님을 죽이려든다는 사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완전한 신앙.  이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커다란 은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항상 간구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지 못하겠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피조물인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 국한시키려고 하는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빵 하나를 같은 질량의 빵 열 개, 아니 두개를 만드실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000명을 먹이시고도 12광주리 넘게 만드셨습니다. 그 말씀이 사실인지 아닌지 어떻게 믿을 수 있냐고요?  사람인 이상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고 내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믿기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이 성서에 적혀있고 그리스도인은 그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한 하느님이라고 믿는 사람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