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절 희 년(禧年)

희년의 유래
구약성서는 희년에 대해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희년은 안식년을 일곱 번 거듭하고 난 다음에 찾아온다. 49해 일곱째 달 10일(속죄일)에 나팔을 불어 거룩한 해(희년)를 선포하였다. “50년이 되는 이 해를 너희는 거룩한 해로 정하고 너희 땅에서 사는 모든 사람에게 해방을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킬 해이다. 저마다 제 소유지를 찾아 자기 지파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50년이 되는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지낼 해이니, 씨를 심지도 말고 절로 자란 것을 거두지도 말며 순을 치지 않고 내버려 두었는데 절로 열린 포도송이를 따지도 말라”(레위 25,8-11). 희년에는 안식년의 규정을 따라야 한다. 희년에는 사람뿐 아니라 가축과 동물들, 그리고 땅까지 휴식을 취하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해이다. 또 가난 때문에 팔린 땅이 제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마지막 안식년과 이어서 오는 희년에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노예를 해방시켜야 하기에 하느님께서 마지막 여섯째 해(안식년)에는 소출을 세 배로 늘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레위 25,20-22 참고).
희년은 거룩한 해로 선포되고, 모든 사람에게 해방이 선포되는 해로서 다른 안식년과는 구별되었다.

희년의 의미
7이라는 숫자는 완전하고 거룩한 숫자이다. 더구나 일곱에 일곱을 곱하고 하나를 더한 숫자는 시간의 충만함을 나타낸다. 이 충만함은 언젠가 완성될 세상을 의미하고 있다. 희년은 땅과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을 원상 회복시켜 원래대로 자유롭게 살도록 해 주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뜻에서 희년은 ‘해방의 해’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얼마나 멋있는 세상인가? 그러나 이러한 안식년이나 희년의 규정은 이상(理想)으로만 머물렀고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이 이상의 세상은 언젠가 오실 메시아에 의해서 실현되리라는 희망으로 살게 되었다. 그러니까 희년 규정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에 의해서 이루게 될 해방과 자유를 예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의 은총의 해’(루가 4,19)라고 표현하였다.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선포되고, 갇힌 자들과 속박된 자들이 풀려나고,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는 것은 주님의 정의가 실현되는 것으로 표현하였다(이사 61,1 이하). 이러한 ‘주님의 은총의 해’는 분명히 어떤 구원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 구원의 시기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시작하셨고, 이러한 시기를 기다리던 이스라엘에게 이 사실은 선포되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 나라가 왔음을 선포하였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여러분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마르 1,15; 마태 4,17).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주권하에 죄와 고통, 분열과 죽음과 같이 인간을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을 이룬다.
예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공적으로 가르치시며 희년을 선포하시고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가를 알려 주셨다. “성서를 읽으시려고 일어서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들고 이러한 말씀이 적혀 있는 대목을 펴서 읽으셨다. ‘주님의 성령께서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하고 말씀하셨다”(루가 4,18-21). 예수님은 여기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가 바로 당신 자신이고, 기다리던 시기가 바로 오늘 시작되고 있음을 밝히셨다.
또 실제로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셨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시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마태 11,4-5; 루가 7,22)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고, 죄인들을 용서해주셨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구제될 수 없는 사람들이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고 말씀하심으로 기다리던 구세주가 바로 당신임을 알려 주셨다. 해방을 주는 이러한 예수님의 행업은 전 생애 동안 지속될 뿐만 아니라, 세상이 완성되는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는 현실세계의 질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세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였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다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그들을 화해시켜 하나로 만드시고 율법조문과 규정을 모두 폐지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유다인과 이방인을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에페 2,14-15). 실제로 인간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벽은 무너지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빈부귀천이 없어지고 남녀평등이 이루어지고 노예가 없어진 사회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초대교회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었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한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사도 2,44-47). 이렇게 하느님의 주권이 인정되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영광드리는 세상, 이것이 희년의 실현이고, 이것을 이상으로 삼는 것이 우리 신자들의 몫이다.

희년은 기쁨으로 충만한 해이다. 이 기쁨은 내적 기쁨뿐만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나는 기쁨이어야 한다. 이 기쁨은 누구나 누릴 수 있도록 초대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나 자신부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살 수 있도록 준비하여야 하고,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의 은총을 나누어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갖추도록 해야 하겠다.
이 조건의 첫째는 회개이다. 회개는 두 가지로 이루어져야 한다. 하나는 소극적인 것으로서 죄에서 벗어나는 해방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적극적인 것으로서 윤리적인 선을 추구하는 것이다. 특히 사랑의 문화를 건설하여 세계 안에서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 우리의 생활 〉
?희년은 무엇보다 기쁨의 축제이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떠올리고,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땅을 제 주인에게 돌려주고, 동족을 종살이에서 풀어 주고, 힘겨운 노동에서 인간과 땅을 쉬게 하고, 가난한 이들이게 그 혜택을 돌려주고, 빚을 탕감해 주고, 죄를 벗는 일 등은 모두 다 새 삶을 누리는 신명나는 일이다. 그래서 복 희자를 쓰는 희년(禧年)이다. 이사야가 말한 이 복된 ‘주님의 은총의 해’를 예수께서 선포하신 것은 온 인류에게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예수님은 미래 희망으로 남아 있던 희년을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면서 이루셨다. 그러나 아직도 그 나라는 완성되지 않았다. 희년의 참뜻과 요구는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실천해야 할 의무이다.
희년의 깊은 뜻을 깊이 깨닫고 자신부터 회개하여 세상 모두가 참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주님의 사랑을 배우자. 사랑은 모든 덕행의 기초이며 완성이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율법주의이고, 사랑이 없는 신앙은 이념이고, 사랑이 없는 희망은 이기주의가 되고, 사랑이 없는 용서는 자기 비하이고, 사랑이 없는 용기는 무모함이고, 사랑이 없는 너그러움은 자기 과시이고, 사랑이 없는 봉사는 단순한 의무가 되고, 사랑이 없는 성실성은 종의 근성을 갖는다. 사랑은 원래 하느님의 것이며, 인간을 살리고, 인간에게 기쁨을 준다. 주님께서는 이 희년을 선포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대희년 길잡이 3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