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문화와 교회의 역할 |
인류역사의
발전과정에는 언제나 그 시대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사상이 있었고 때로는 그
시대를 주름잡는 중심인물이 나타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제분야의 발전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한 사상과 인물은 짧은 당대에 그 역할이 끝나 역사의 뒤안길에 영원히 사라지기도 하고 또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빛이 더욱 빛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렇게 성립된 문화는 나름대로 고유성을 띠면서 민족문화를 형성하기도 하고 한 시대문화를 형성하여 먼 후대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런데 본론에서 말하고자 하는 서양의 중세문화는 후자에 속한 것으로 굳건한 그리스도교 사상이 중심이 되어 로마제국의 멸망 후 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고 천년이란 오랜 세월을 영도하였으니 당시의 교회 역할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다시말하면 서양 중세사회의 정신적 활력소가 된 보편적 그리스도교 정신이 그 근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시대의 지도이념과 문화는 세계적, 인류적 보편성을 띠지 않으면 오래 지탱할 수가 없다. 즉 당대인의 감각과 생활에 알맞고 정신생활에 활력소가 되는 문화가 아니고는 유지, 발전할 수가 없다. 20세기 영국이 낳은 세계적인 석학(사가, 현대문명비평가)인 도오슨(Christopher Dawson)교수는 서양중세는 암흑이고 무가치한 시대가 아니고 어느 의미에서 근대보다 더욱 현대의 세계정세와 흡사한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게르만(German)과 노르만(Norman)의 민족이동을 통한 혼란한 사회와 미개한 그들을 개종케 하고 유럽사회를 안정케 한 중세 그리스도교 정신의 역할을 높이 평가한 말로 해석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고도로 발달된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 방향감각조차 바로 잡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현대인의 정신문명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중세 그리스도교 정신에 입각한 교회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과 대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교 정신은 서양중세 사회만을 바르게 인도한 것이 아니고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 그 빛이 더욱 빛나며 현대 사회에서도 그러한 역할을 기대하고 있으니 그 위력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다면 서양 중세사회에 있어서 가톨릭 교회의 역할이 어떠하였는가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1921년 '교회의 사회적 역할(Le role social de L'eglise)'이란 책자를 발간한 프랑스 파리대학의 쉐농(chenon)교수는 가톨릭 교회가 지금까지 세계문화 발전에 얼마나 공헌하였는가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의 이 저서는 30년간의 오랜 연구 결과라는 점에 무게가 있지만 고금의 많은 사료와 반(反) 가톨릭 학자들의 논란공격(論難攻擊)을 세밀히 검토한 결과 씌어진 책자라는 데 더욱 무게가 있다 할 것이다. 쉐농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서양문화에는 강고한 그리스도교적 정신문화가 그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으므로해서 난숙한 물질문화의 꽃이 아름답게 필 수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세계문화의 역사는 그리스도교의 역사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쉐농 교수의 견해에 대해서 영국의 저명한 역사가이며 현대문명 비평가인 도오슨(Dawson)교수도 그의 저서인 '유럽의 형성(The making of Europe)'에서 "서양중세는 한마디로 말하여 그리스도교 문화시대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교와 문화는 지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가톨릭교회가 유럽문화 형성에 큰 정신적 원동력이 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 서양중세는 그리스도교적 세계라는 이름의 사회적, 종교적인 통일체가 육성되어 그리스도교적 신앙과 윤리 그리고 지성(知性)이 점차 유럽문화의 핵심이 되었다. 따라서 서양중세 교회는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적 영도자로 신앙 뿐만 아니라 지식의 영도자, 고전문화의 보존과 도덕성의 앙양, 근로의 신성성, 평등의식의 고취 등 서유럽 형성의 개척자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중세교회는 하나의 국제국가, 국제왕국으로서 초국가로 군림하여 당시의 국제사회의 조정역할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교회도 법률, 입법자, 법정 및 법률가가 있었고 13세기에는 교회가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중세후기에는 교회법이 전유럽의 공동법으로서 제법률로 인정되었다. 또한 가톨릭 법률은 일정한 시일내에 교회와 화합하지 않고 파문 처벌된 자는 역시 국가에서도 공권을 상실한 자로 취급받아야 한다고 포고하였다. 그래서 제왕도 파문을 받으면 국민들에게 왕의 구실을 못하였다. 뿐만 아니라 교회로부터 처벌받은 이단자가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국권에 의해 새로운 재판을 받을 필요없이 사형이 집행되었다. 즉 교회법은 국법의 상위에 위치하여 그리스도교적 사회발전에 공헌하였다. 또한 중세사회에서의 지식계층은 성직계급 이외는 별로 없었으므로 자연 성직계층이 의원 또는 행정관으로 국가에 봉사하였고 국민회의에 출석하여 지도적 역할을 하였다. 잉글랜드와 스페인에서는 반대로 왕국과 그밖의 세속적 권력자가 교회의 제회의에 참가하였다. 특히 당시 문화활동의 중심은 교회의 수도원이었다. 수도원 제도의 가장 중대한 의의는 학문 특히 고전문학의 전통을 보존하고, 빈민구제, 병자의 간호, 약자의 보호, 사회교화, 지식보급, 복음전파 등 국가기능의 수행이다. 따라서 당시 교회는 문화활동의 중심지로서 교육, 사상, 문학, 예술, 도덕, 풍속 등 그리스도교의 교의(敎義)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수도원은 기도와 명상생활을 통하여 학문연구와 자립생활을 근본정신으로 근로의 신성성을 고취하여 노동은 하느님에 대한 봉사로 중세 경제발전에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하여 유럽의 정신 세계를 바로잡고 오늘날 서양문화 발달에 산실 역할을 하였다. 또한 최고 지식을 양성하는 대학도 교황의 특허를 얻어 교회내에 설립하였다. 교수들은 성직록을 받고 있는 성직자들이었으며 12세기부터는 수도원 부속학교로 대학이 발생하였다. 대표적 대학으로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이탈리아의 사래르노(Salerno)대학, 보로그노(Bologno)대학, 프랑스의 파리(Paris)대학, 영국의 옥스퍼드(Oxford)대학 등이 있다. 이들 대학들은 모두가 700-800년의 역사전통을 자랑하고 지금도 그 명성을 날리고 있다. 당시 대학들은 교황이나 왕으로부터 여러가지 특권을 부여받고 있었으며 학생들도 특별대우를 받았고 대학은 각기 특성을 갖고 있었다. 즉 사래르노 대학은 의학으로 유명하였고, 보로그노 대학은 법학, 파리 대학은 신학으로 그 명성이 높았다. 특히 파리대학은 노틀담 교회의 부속학교로 출발하였는데 당시 프랑스가 낳은 매혹적인 철학자인 아벨라드(Abelard)와 이탈리아 출신인 파리 주교 롬바르드(Lombard)등과 같은 저명한 인물을 배출하였다. 이들의 명강의는 많은 군중들의 심금을 울렸다. 중세 초기의 학문은 교부철학(敎父哲學)이 중심이었고 후기에는 스콜라(Schola)철학이 중심이었다. 초기의 중세철학은 신학의 시녀란 말이 있듯이 철학과 신학은 별도로 분리되지 않았으며, 철학은 신학체계에 동화되었다. 교부(敎父)라 함은 초대 그리스도교의 지도자를 지칭하였는데 신국론, 고백론, 삼위일체론을 저술한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인간은 원래 자유의지를 갖고 있으나 아담이 죄를 범한 때부터 원죄를 얻어 그 죄는 신(神) 즉 그리스도에 귀의(歸依)함으로써 구제된다고 하여 교회 밖의 구원은 없다는 중세철학의 원칙을 확립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은 신에게 절대 복종할 필요가 있으며 교회는 지상에 있어서 하느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역사는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대립으로 지상의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세속보다 우월하다는 교의와 권위를 확립하였다. 특히 그는 이러한 신학체계를 마련하여 플라톤 내지 신플라톤의 철학을 빌려 설명하여 중세인들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받아들이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중세후기 학문을 대표한 것은 스콜라 철학으로 교회와 부속학교에서 가르쳤다. 이는 9세기 예루게나(Eriugena)에 의해 창시되고 안셀무스(Anselmus), 아벨라드(Abelard) 등에 의해 발전되고 13세기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 의해 대성되었다. 특히 그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은 중세철학의 집대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신앙과 지식의 타협을 시도하여 이성과 신앙의 조화로 신학의 과학성을 강조하여 명목론(名目論, 이성의 선행)과 실재론(實在論, 신앙의 초월성)의 조화와 합일을 이루어 놓았다. 또한 중세문학 역시 종교적인 색채가 농후하였다. 특히 민족고래의 신화와 전설, 영웅의 사적을 노래한 서사시가 유행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독일의 민족적 서사시인 '니밸룽겐(Nibelungenlied)의 노래'와 기사문학으로는 영국의 전설상의 지배자 '아더왕의 이야기'와 찰스대제의 영웅담인 프랑스의 '로랑의 노래'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초기에는 라틴어로 씌어지고 작자도 교회관계자가 대부분이었으나 후기에는 차츰 속어(俗語)로 씌어져 기사(騎士)의 모험이나 연애를 주제로 하는 기사문학이 성행하였다. 예술방면에 있어서도 교회중심으로 발전되었는데 특히 교회건축이 중심이 되었다. 초기에는 바시리카, 중기에는 로마네스크 양식이 주였고 후기에는 고딕양식이 중세 건축을 대표하였다. 이는 천국을 바라보는 중세인의 종교적 동경을 잘 표현하고 있다. 또한 미술도 교회내부의 공간을 장식하는 효과를 지니고 있어 색채유리에 의해 더욱 효화를 표현하였다. 조각 역시 교회를 장식하는 기교에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중세교회는 당시 유럽인들의 정신적 영도자로서 문화의 산실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교회는 참된 문화활동의 중심지로서 국가보다 훨씬 많은 사회적 책임을 다하였다. 참으로 교회는 사랑의 정신의 구현자로 군림하였다. 따라서 국가는 교회에 협조하였고, 교회는 제국간의 분쟁을 조절하고 인도하면서 초국가적인 국제국가로 중세사회를 발전시키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함에 있어서 교회는 많은 시련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당시의 세속적 발전에 따른 시련의 극복은 그리스도교적 사랑의 신앙정신이 있었기에 시련의 극복이 가능하였으리라 믿는다. 따라서 그러한 시련의 과정에 있어서 일부의 세속성만을 탓하여 교회의 전세성인양 유도 평가하려 함은 그릇된 생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실로 서양 중세 문화 발달에 교회는 크게 기여하였고 역사의 흐름에 따라 그 빛은 더욱 빛나고 있으며 정신문명의 고갈로 방향감각조차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현대사회에 있어서 중세사회를 이끌어간 교회의 역할이 요청되는 바이다. 조경래(前상명대
대학원장, 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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