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소

어린이 소공동체

행사안내

게시판

성지안내

 

 

 Home > 본당소개

신축교안(참고자료)

 

 

인사말

 

역사/연혁

 

religion_11.gif 본당사진자료

 

circle03_skyblue.gif 1899 - 1936년 자료

 

circle03_skyblue.gif 1937 - 1954년 자료

 

circle03_skyblue.gif 1955 - 1971년 자료

 

circle03_skyblue.gif 1972 - 1998년 자료

   

circle03_skyblue.gif 1999 - 현재까지 자료

신축교안(참고자료)

 

신축교안(辛丑敎案)  일명 "이재수의 난"

  참고문헌 : 신축교안과 제주 천주교회 (천주교 제주교구), 신축제주교안 (박찬식 시메온), 가톨릭 신문(신축교안)
  사      진 : 신축교안과 제주 천주교회 및 영화 "이재수의 난"에서 발췌

  제주도에 천주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지 2년밖에 안되는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교회와 주민 사이의 충돌 사건이 발생하여 대부분 무고한 천주교 교우 수백명이 천주교인이라는 이유로 민군(장두 이재수)들에 의해 살해되는 교회수난이 발생되었다.(신앙에 열심한 교우들은 배교의 강요에 천주들 증거하며 처참히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사건의 원인은 제주민들이 과중한 세금징수의 폐단 시정이 목표였으나, 천주교의 선교 과정에서 천주교의 선교에 불만을 가진 토착세력(향임과 상인측)과 토속신앙(무당들)의 사주를 받은 세력간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교민과 민군측이 충돌하는 사건으로 전개되었으며, 일부 역사학자들은 민란을 반봉건, 반제국주의 민중항쟁으로 규정, 민란을 주도한 이재수의 희생을 기려 '이재수의 난'이라도 하나,(신축교안의 수습과정에서 책임자로 처형된 이재수, 오을길, 강우백을 三義士로 칭하기도 함) 이 사건은 단순한 민란으로 그치지 않고 프랑스와 정부와의 갈등으로 국내외적으로 큰 영향(프랑스와 일본까지 개입되어 진압되었으며, 4년이나 걸려서 국제재판으로 매듭지어짐)을 미쳤으며, 최근 학계에서는 이를 "신축 제주교안"으로 규정하고 있다.

  제주선교 100주년과 대희년을 맞아 신축교안을 어느 일방적 시각에서 보지 않고 화해와 용서의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천주교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 기념으로 "1901년 신축교안에 대한 종합적 검토"라는 주제를 가지고 심포지움을 개최하여 보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를 계기로 신축교안과 관련하여 '천주교 제주교구와 제주도민을 대표한 `1901년 제주항쟁기념사업회'가 2003년 11월 7일' 화해와 기념을 위한 미래선언'을 채택했다. 두 단체는 이날 오후 제주시 열린정보센터에서 열린 `신축년 제주항쟁 102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선언문을 채택하고' 상호 존중의 기조 위에서 과거사의 진실을 명명백백히 밝힐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제주 공동체의 화합과 상생의 길로 나아가고자 노력한다"고 다짐했다.

  천주교측은 "과거 교회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동양 강점을 위한 치열한 각축의 시기에 선교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주민중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던 잘못을 사과한다"고 밝혔다. 기념사업회도 "봉건왕조의 압제와 외세의 침탈에 맞서 분연히 항쟁하는 과정에서 많은 천주교인과 무고한 인명 살상의 비극을 초래한데 대하여 사과한다"고 밝혔다.

  두 단체의 이같은 `미래선언'은 2001년 제주항쟁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때 거론돼 2년여에 걸친 논의 끝에 채택됐다. `이재수의 난'으로 더 많이 알려진 `제주항쟁'은 1901년 5월 봉세관(捧稅官)과 천주교 세력의 횡포에 대항해 일으킨 민중봉기로 수백명이 숨진 구한말 제주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었으나 역사 속에 묻혀 있다 최근 재조명 작업과 함께 이날 `미래선언' 채택에 이르게 됐다.
(제주=연합뉴스)

관덕정에서 타살된 교인의 시신들이 널려 있다.
이재수등의 난민에 타살된 교민들의 시신이관덕정에 쌓여 있다.
(프랑스 함장 촬영)

 (1) 사건의 원인

 첫째, 제주도(경작지, 목초지,어장, 그물, 소나무등)에 대한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여 중앙 왕실로부터 파견된 봉세관의 세폐(稅弊)로 전체 도민이 경제적인 핍박을 받았으며,

 둘째, 1899년 두 선교사가 파견되면서 시작된 제주지역의 천주교는 주로 화전민, 향리층, 유배인들 중심으로 보급되면서 프랑스 선교사의 치외법권이 외래종교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던 관,토착지배세력, 제주민과의 충돌이 잦았고, 이러한 천주교의 세력을 의지하여 자신들의 불리함을 해소하려는 사람들이 예비신자로 모여들었으며 토착세력의 반발에 부딪힌 봉세관은 자기에 우호적인 일부 교우들을 징세담당자로 기용되어 천주교회의 사회세력이 기득권 세력을 상당히 위협하여,

 셋째, 대정군수 채구석은 향임층과 상인층을 규합하여 상무사를 조직하여 천주교와 대립하였으며, 이 때 제주도에 몰래 들어와 제주해녀와 갈등을 빗고 있던 일본의 밀어업자들이 자신들에게 집중된 제주민의 반감을 프랑스측에 전가하기 위해 상무사을 사주(무기공급등)하여 민란을 유도하였고, 무속인들이 자신들의 입지가 잠식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천주교를 음해하는 유언비어를 살포하여 우매한 제주민을 선동함으로써 민란이 잔인한 살육으로 학대되었다.

구마슬 신부님

신축교안을 겪으신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구마슬(Marcel-Lacrouts)신부님(좌측)과 문제만(Mousset) 신부님(우측: 주교님이 되시어 2대 대구교구장을 역임한 서귀포 본당 2대 주임)

사건의 원인은 제주민들이 과중한 세금징수의 폐단 시정이 목표였으나, 천주교의 선교 과정에서의  토착세력과 토속신앙 세력간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교민과 민군측이 충돌하는 사건으로 전개되어 무고한 천주교 신자 수백명이 살해되는 비극으로 전개되었다.

한논성당 박고스마회장 서간

제주성에서 난민들에 의해 처참히 살해된 한논(서귀포)성당의 박고스마 회장이 김원영신부께 쓴 편지:
  김(원영) 신부님전 상서, 찬미 예수 무궁하시옵소서. 기체후 두루 안녕하신지요? 아뢰올 말씀은, 다름이 아니오라 방금 상무사 수령 오을길, 마천삼, 강백이, 강희봉이 모두 부화뇌동하여 무리를 지어 가지고 갑자기 각 마을의 백성들을 수십만 軍으로 내몰아서, 만약 교우를 만나면 결박해 구타하니 혹은 상하고 혹은 사망한 자가 부지기수로소이다. 한논의 교인이 허둥거리며 달아나 남자 교우는 모두 제주 성당에 모이고, 여자 교우는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교우들은 장차 어찌해야 할지 몰라 다만 성당을 지키면서 단지 주님의 은총만을 바랍니다. 이와 같이 어지럽고 황만하고 두려운 사정을 대략 우러러 호소하오니, 엎드려 바라건대 신부님께서 이 같은 연유를 헤아리시어 이후 이러한 악당을 막아 주시고, 성당을 안전히 보호해 줄 것을 천만 바라옵나이다. 신축년(1901년) 3월 22일(양력5월10일) 교우 朴고스마상서    한논 朴회장 재배 상서

신축교안 직후의 관덕정
신축교안 직후의 제주 관덕정


제주성의 두 파리 외방전교회 신부
(사진 : 영화 이재수의 난)


신축교안으로 희생 교인들이 묻힌 황사평묘

제주에는 신축교안과 관련된
2곳의 성지가 있음.

(제주관덕정, 황사평묘
)

 (2) 사건의 발단

  1899년 정의군 하효리와 서홍리(현 서귀포) 향임들이 자기 집 앞에 교우를 배격하는 나무패를 설치하여, 자신의 마을에서 천주교민들을 몰아내려는 일이 생겼으며, 이러한 대립과정에서 오신락 노인 자살사건이 터져 나왔다.

  [오신락 사건] 1900년 6월 김원영 신부가 서귀포 한논에 교회를 설치하려고 하자, 인근 토착세력이 교회설립을 방해하여 김원영 신부가 제주목사를 찾아 따짐으로서 일단 무마시켰다. 그러나 1901년 2월 하효리의 현규석등은 교회를 배척하는 글을 집 앞 길거리에 세움에 따라 이를 항의하려 간 교민 오현달 등이 현규석의 심부름꾼인 오신락 부자에게 구타 당하여 4인은 생명을 위협 당하는 중상을 입었다.

  이에 김 신부는 교민 40여명을 보내어 현규석, 오신락등을 잡으려 갔으나, 현규석이 피신해 버리자, 그의 부친 현유순과 오신락 부자를 잡아 곤장을 쳤다. 그리고 이들을 교회 근처의 신자 집으로 끌고가 다음날 관아에 보고하려고 하였으나, 그 날밤 관아의 처벌을 두려한 오신락이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여 버렸다.

  이 죽음의 원인이 교회측에 있다는 소문이 민간에 펴져 제주민들의 교회에 대한 반감이 커져 갔다.

 (3) 신축교안의 전개(1901년)

 [발단]
 2. 9 : 정의군(현 서귀포시 하효동)에서 오신락 자살사건 발생
 4~5월초: 대정군수 채구석 상무사 설립 교우들 침탈 시작
 
5. 6 : 상무사와 교민들과의 충돌, 대정군민 민회개최

 [정소운동]
 5. 9 : 교민들 제주읍 교회(현 중앙성당)으로 피신,
         민군이 두 무리로 제주성 향함.
교민 무장준비
 5.10 : 라끄루(구) 마르셀 신부 서울에서 돌아옴, 봉세관 피신

 [민란확대]
 5.14 : 교민 한림민회소 습격 오대현등 장두체포 민군의
          대정성 진입, 양측발포(주민1명 피살)

          이재수 민군대장으로 등장
 5.15 : 민군, 일본인(지원)으로부터 총포로 무장
 5.16 : 교민, 제주읍성 폐쇄, 대포 설치
 5.18 : 교민, 제주읍의 무기접수, 민군과 충돌, 주민다수 피살
 5.20 : 교민 장윤선 목포 파견, 프랑스 함대 원조 요청
 5.23 : 교회측 오대현등 석방
 5.24 : 민군의 교민학살 계속, 민군 제주성 포위, 간헐적 공격
 5.25 : 제주성내 민인들의 개문 요구
         
(민군 진입시 협조자로 살해 위협)

 [교민의 학살]
 5.28 : 개문, 민군의 입성, 교민들 집단 살해됨
 5.31 : 프랑스 함대 2척 도착, 이재호 제주 목사 부임
 5.28~6.8 : 교민학살이 계속됨.
                
(제주관덕정에서 몽둥이로 타살함)
 6. 9 : 프랑스 함대 1척 도착, 교민 50여명 목포로 피신

 [민란의 진정]
 6. 10 : 찰리사, 정부군도착, 민군에 해산령
 6. 11~ : 민군대표 체포, 장두 3인 처형

 [민란수습]
 1903. 4 : 제수목사 홍종수와 구마슬(Marcel-Lacrouts)
              신부의 접촉으로 제주시
 별도봉 밑에 묻혀 있던
              피살 교인
의 무연고 시신을 수습하여 황사평
              
으로 이장함.    

구마슬(Marcel-Lacrouts) 신부가 조선 교구장
뮈텔주교께 올린 편지 형식의 신축교안 보고서

(라쿠루 신부 편지.hwp 다운받기)

[신축교안의 교훈]

1. 신축교안은 한국 및 제주 천주교회에 부정적으로 비추어져, 제주민들의 천주교에 대한 비우호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선교 초기 서양선교사들의 토착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공격적인 선교방식이 수구적인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로 민란의 과정에서 민군의 무분별한 교인의 살해로 수백명의 교인들이 수난을 당하였다는 점은 아무런 이유에서고 합리화될 수 없는 일이며, 민군의 배교의 회유 속에서도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바치신 순교자들의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2. 이곳 제주에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지 채 2 년도 안되어 엄청난 수난을 겪고 배타적인 시기에서도 교세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신축교안 과정 속에서의 많은 순교자들이 당시사회의 부패와 죄악상에 대한 대속이었으며, 미래의 제주교회를 위한 희생양 이었다고 보아진다.

3. 1899년 2명의 선교사가 파견되면서 크나 큰 수난을 딛고 이룩한 제주교구 선교 100주년을 맞아, 교회 설립 초기의 어려움 속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신앙을 키워온 선조들을 결코 잊지 말고, 화해와 용서로 다가선 2000년 대희년을 맞아 신앙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다.

  Copyright 2005 서귀포성당 All rights Reseved.
  주소 : 우) 697 - 013  제주도 서귀포시 송산동 586번지
  Tel. 사무실 : 064) 762 - 3444  Fax. 064) 733 - 5551

본 홈페이지에 게시된 이메일주소가 자동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본 홈페이지는 익스플로러 5.5이상 해상도 1280 * 1024 환경에서 최적화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