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지방의 토착 관료들과 제주에 진출해서 어업 이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 밀어 업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이 달려 있던 이 문제를 둘러싸고 봉세관에 대한 주민들의 불만을 교묘하게 이용하려 했다.
이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당시 민중들의 불만을 천주교인들에 대한 반감으로 돌림으로써 무수한 인명을
희생시키 신축교안을 발생시킨 원흉이다.당시 제주도에는 일본인들이 뒤에서 후원한 지방관리와 토호들의 조직인 사설상무사(私設商務社)라는 것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01년 5월 대정군수 채구석과 강우백, 이재수 그리고 유림의 좌수 오대현은 도민을
규합하고 일본 상인과 결탁해 그들로부터 무기를 입수, 무장하여 봉세관과 교회가 있던 제주읍성을 포위한 채 닥치는 대로 천주교인들을 잡아
죽였다.
이 소식을 들은 라크루 신부는 교우들을 이끌고 제주읍성을 방어하는 한편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
함대에 구원을 요청하였지만, 5월 29일 제주성은 함락되고 많은 교우들이 관덕정에서 뭉둥이로 타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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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민란의 진정 이후, 제주목사에게 이들을 매장할 공동 안장지를 제공해 줄 것을 요청,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아 시신들은 제주읍에서 조금 떨어진 산(별도봉) 기슭에 버려지듯 묻혔다.
그 후 프랑스공사가 조선 조정에 이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청하여 1903년 1월 홍종수 제주목사와
라크루(구마슬)신부와의 접촉과 양국간의 교섭이 원만히 진행되어 1903년 4월 황사평을 그 매장지로 양도 받았다.
당시 별도봉 밑에 묻혀 있던 피살된 교인들의 연고가 있는 분묘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장해 가,
나머지 무연고 시신(28구, 26기)들만 신축교안 중 민군의 훈련 및 진지가 구축되었던 황사평에 이장 했다.
이 곳 황사평은 총 18,000평으로 신축교안의 순교자뿐 아니라 현재 제주교구의 공동 안장지로도
사용하고 있다. (제주의 성지 내용 일부
인용)
1980년에 황사평 교회묘지를 공원묘지로 공사를 하였고, 선교 100주년으로 1999년
김기량(펠릭스 베드로)순교비와 파리외방전교회 및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공덕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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